한국교회의 역사
수원교회사
pearltim 2021-04-12 , 조회 (11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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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역사

(왕중생형제님은 한국인으로 대전 대덕이 고향이며.한국이름은 권익원이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 가셨고 . 대만에서 회심후 왕중생으로 개명하셨다. 1966년 위트니스리에 의해 한국의 복음을 위하여 보내어졌으며.이때 왕중생형제님께서는 대만 정부로 부터 연금을 받고 있었는데. 한국의 정책이 이중국적자들은 하나의 국적을 같도록 하여서 대만의 국적을 포기함으로. 왕중생에서 한국이름인 권익원으로 바뀜과 동시에 대만 정부로보터 받던 연금은 상실되었다. )

이희득 형제님의 간증

왕형제님은 19세때 그의 부친을 따라 중국대륙으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이후에 대만에 와서 심각한 폐병에 걸려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자살을 시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는 복음을 들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런 후에 왕형제님는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주로 타이난에서 하였다. 1965년에 이상수 형제님이 타이베이에서 특별집회를 할때 한국에는 주의 회복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으로 부터 무거운 부담을 받게 되었다. 왕중생 형제님은 30여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을 잘할수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님의 음성을 거절하였으나 내적 부담은 오히려 더욱 무거워져 이상수 형제님을 찾아가 교통하게 되었다. 이상수 형제님은 그때서야 비로서 그가 한국인 임을 알게 되었다.

1966년 초에 왕형제님는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편지를 써서 연락하게 되었고. 그해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한국을 떠난지 30여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 당시 왕형제님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이해 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친척은 그가 많은재산를 가지고 돌아오리라 기대 했으나.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한국에서 30년 동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재혼하지 않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오고 있었다.

왕형제님은 귀국 후 집을 열어 하숙집을 운영하였고. 몇명의 학사장교들이 그집에 묵게 되었고. 또한 간단한 완구를 제작하여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968년까지 단지 그들 일가 네명만이 구원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해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 하였는데 학사 장교 생활을 대전에서 하게 되어 왕 형제님의 집에 거하게 되었다. 저는 왕형제님이 한국에서 처음얻은 사람이었다.

대전은 한국에서 주의 회복이 시작된 곳이다. 처음 왕형제님을 뵈었을때 그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수있었다. 저는 그의 집에 2년간 거하면서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되었다. 제가 그의 집에 머물기 전에도 많은 학사 장교들이 거기에 거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했으나 주님은 단지 저 한사람 만을 얻으셨다.

후에 왕형제님은 대전에서 덴마크 선교사가 설립한 한 선교단체을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복음에 대한 인식를 갖고 있었기에 함께 집회를 시작할수 있었다. 1970년 제가 서울로 올라 왔을때 몇명의 중국 형제자매들이 쉬 자매님의 집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쉬 자매님의 님펴은 중구 영사관에서 일을하고 있었다. 저는 서울의 집회에 참가한 첫번째 한국인이었으며. 이후에 저의 여동생도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다음 한국의 형제 자매들이 교회안으로 인도 되었디.

1972년 첫번째 전국 특별집회를 가졌는데 육칠십명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였다. 이때 왕 형제님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교회를 전 하셨다. 왕형제님은 한국어가 능숙하지는 못하였으나 능력으로 충만 하였다. 그 집회는 실로 성령의 능력과 말씀이 충만하였다. 마치 천만의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덴마크에서 온 선교사들 조차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었다. 저는 그 집회에서 나의 생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특별집회 후 한국에 교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광주에서 한 자유 단체가 연결되었고 그 단체가 주의 회복으로 둘어왔다. 또한 수원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얻어졌는데 목사들도 있었고. 그들은 목사직을 내려놓고 주의 회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힘든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들은 매우 큰 댓가를 지불하고 주님을 따른 것이었다.

그후 대전의 한형제가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 와 부산에서 주님의 간증이 일어났다. 1972년 지금은 한국에서 30여곳의 교회가 있으며 약 2000여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다.

1982년 1월 제20회 전국 특별집회를 가졌으며 후에 10일간의 청년 특별집회가 있었다. 이 특별집회를 통해 왕 형제님의 전 존재는 거의 소진 되었다. 왕 형제님은 그의 모든 피와 땀을 형제자매 들에게 쏟았는데 특별히 청년들에게 그러했다. 청년 특별집회가 끝난 후 왕형제님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왕형제님의 심장과 하나 남은 폐에 병이 있었는데. 그가 그렇게 오래 살수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았다. 그리고 1982년 2월 1일 병원에 2주동안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주님을 뵐때가 되었음을 알았다.그리고 주님의 품으로 안식하셨다.

*장오신 형제님의 간증*

왕중생형제님은 한국인으로 대전 대덕이 고향이며.한국이름은 권익원이다.한국에서의 회복은 왕중생형제님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억압하자 한국에서는 애국지사들이 일어났는 데 그중에 왕중생 형제님의 가정이 있었다.왕중생형제님의 가정은 항일가정이었다. 형제님은 결혼하자마자 독립운동을 위해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그리고 왕성화로 개명하고 중국인이 되어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전쟁이 끝난후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와서 심각한 폐병으로 베이터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장상택형제님 과 홍친청형제님이 왕중생형제님을 인도하여 주님을 알게 되었다.

구원받은후 왕중생형제님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기 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한국인 인줄 알지못했다. 1965년에 이르러서 위트니스리형제님이 특별집회에서 한국에 아직 주의 간증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은 왕 형제님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1966년 왕형제님은 장오신, 장상택 형제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은 한국인이고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한국에 갈 부담이 있다고 말하였다.

장상택 형제님의 간증

한국에 간증이 처음 시작될 때는 매우 어려웠으며 왕 형제님이 한국에 돌아가 1년이 지나도 단지 4명의 가족만이 구원받았을 뿐이었다.1955년 부터 나는 왕형제님과 베이터우에서 함께 교통하고 동역하였다. 비록 나중에 그가 남부로 내려가서 일을 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봉사에 있어서 항상 교통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 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항상 교통하고 중보기도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놓으셨을때 나는 한국에 가서 그를 보고자 하는 부담이 있었다.

대전에 갔을때 이희득형제님이 그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가 할수 있덨던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매우 흥황하여 눈을 들어 보는 곳마다 십자가가 있는 뾰족한 건물이 이었고. 서울에 많은 곳에 예배당이 있었으나 영적인 상황은 너무나 황량하였다. 우리는 길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서 다만 기도하였다. 그 후 조금씩 왕 형제님의 친척과 친구사이에서 구원받는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1972년 내가 다시 갔을때 평택과 대전 광주등지의 몇몇 교파에서 우리가 가서 말씀 전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두사람은 함께 동역하여 말씀을 전파하였다. 약 1년이 지난 뒤에 각 교파를 돌아다니며 간증하고 주님의 말씀을 해방함으로 한 무리의 주님을 원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그들이 교파에서 나와 지방마다 몇 명밖에 되지는 않지만 주님의 간증이 시작되었다.서울교회도 이와 같았는데 먼저는 쉬 자매님의 집에서 기도를 하였고 그 뒤 교파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인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대전도 이와 같이 형제회였던 덴마크 선교사의 단체를 발견하고 그들과 교회의 빛을 교통하고 난 다음에 일부의 사람들이 그 모임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대전에서의 모임이 조금씩 견고하게 되었다.

왕중생 형제님께서는 좋은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어떤 일을 할때 철저하고도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생명과 교회를 매우 강조하였다. 다른 면에서 기도로 말씀먹기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길이었다. 한국교회의 찬송은 매우 특별하였는데 두꺼운 찬송가를 모두 외울정도로 찬송을 하였다. 한사람이 찬송을 시작하면 모두 따라서 함께 찬송을 불렀고. 찬송을 부를때 모두가 찬송의 영안으로 들어가 영을 해방하였다.성도들의 온 존재가 찬송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집회는 매우 달콤하고 성령이 충만하였다.그래서 기독교에 있는 사람들이 일단 오기만하면 찬송과 집회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일년에 두차례 8월과 1월에 전국 특별집회를 열어 애나하임에서 열린 라이프 스타디 훈련집회내용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공급하였다. 왕형제님이 특별히 우리가 훈련의 메세지를 가지고 갔을때 많은 공급과 빛을 얻었다고 나에게 간증하였다.

이상수형제님의 간증

주님은 기묘하신 분이시다.주님은 어떤 지방을 위하여 어떤 환경하에서 한 사람을 예비하신다. 주님은 중국을 위하여 워치만니 형제님을 예비하셨다. 주님은 한국을 위하여 왕중생 형제님을 예비하셨다. 한국사람들은 매우 진취적이면서도 매우 비밀스럽다. 그래서 중국인이 주의 회복을 한국에 가져간다는 것은 실로 어려웠다. 만일 한국에서 태어났다가 이후에 중국인이 된 왕중생 형제님이 없이 중국어를 하는 중국인이 한국에 가서 주님의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면 그 어려움은 너무나도 컸을 것이다.

나는 남쪽에 있던 한 형제의 소개로 처음 왕중생 형제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나는 그가 중국인 같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가 한국인 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인이 비밀스럽다는 것을 증명한다. 1965년에 내가 해외에서 돌아왔는데 그가 나에게 한국에 갈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주님께서 형제님을 인도 하실 것이니 가십시오. “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결코 마음을 열어서 자신이 한국인 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상당히 흐른후에 이 비밀이 드러났다.

왕형제님은 실로 주님께서 한국에서의 주의 회복을 위하여 예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거의 30년을 보냈지만 그의 피속에는 여전히 한국의 피. 곧 비밀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외적으로 크게 드러나게 일하지 않고 비밀한 방식으로 사역을 하였다. 이것은 옳다.만일 당신이 한국에 대히 조금 알고 그곳에 가서 일하고 싶다면 왕형제님의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비밀한 방법이 없다면 일을 시작할수없고 시작해도 실행할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 감사한다. 그는 그다지 많은 메세지를 전하지 않았고 다만 그리스도가 생명이신 것과 교회를 말하였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실행하였으며 찬송을 불러서 영을 해방 하였다. 찬송을 불러 영을 해방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한국 교회들이 으뜸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영이 입으로부터 흘러나올 뿐 아니라 어께 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들은 온몸으로 찬송을 불렀으며 몸을 흔들어 가며 찬송에 도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는 사람들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00퍼센트 옳은 것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알아야 할것은 교회는 한몸이며 몸은 한면으로는 지방적으로 나타나지만 또 한면으로 우주적인 것이어서 비밀스럽게 나갈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는 우주적인 한 새사람이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때 혈액순환이 없으면 안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새사람 안에 교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 것이 좋은지 아신다. 주님은 먼저 왕 형제님을 통하여 한국에서의 일을 시작하셨고 합당하게 기초를 놓으셨다.

현재 주님은 왕 형제님을 데려가셨고 다시 이희득형제를 일으키셨다. 왕 형제님은 한국에 돌아간 후에 한국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있는 곳에 갔을때 그는 우리를 이해 했지만 우리는 그를 이해 할수없었다.그가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희득 형제는 영어를 할수 있어서 우리 두사람은 영어로 직접교통할수있었고, 전화든 편지든 통역이 필요치 않았다.다른 몇명의 한국인 형제들도 영문 편지를 써서 나에게 보내 왔다. 모두가 투명하며 열려있다고 느꼈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실로 매우 아름답다. 먼저 왕중생형제님을 예비하여 한국에서의 주의 회복을 일으키셨다. 후에 그분의 몸인 새사람을 위하여 이희득 형제를 얻으셨다.

우리는 몇몇 형제들의 간증을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보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주의 회복은 주님 자신이 시작하실 뿐아니라 또한 그분께서 과정 안에서 모든 것을 바른 궤도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분은 어느때에 사람이 필요한지 아시며 시간과 지리적인 것과 상황과 환경에 있어서 합당하게 일하시고 예비하신다. 이로인해 우리는 실로 그분을 경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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