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회사(연속)
잔잔한 시냇가
생명강가 2021-04-17 , 조회 (21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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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회사 (신론교회 역사가 추가됨)

나는 주님의 은혜로 2014년 10월20일 2번째 로마여행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로마 기행문을 쓰는 과정에서 2000년 교회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워치만니 형제님은 20대에 2000년교회 역사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리고 주님은 지나간 과거에 수원교회안에서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수원교회를 돌보셨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느낌도 갖게되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계시의 소중함을 볼수있다.그리고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확증되었는지를 볼수있는데.이것을 보는것은 우리모두에게 너무나 가치있는 일이다.또 이 일을 재고함으로서 주님께서 수원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고 우리의 교회생활의 거울로 삼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수원교회를 세우신 분들중에는 이미 주님의 품안에 가신분들도 계신다.그래서 이번 겨울에 주님의간증을 지키며 교회생활안에 계신 한분 한분의 형제님들 과 자매님들을 만나야 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수원교회는 1973년12월에 이윤규목사님(37세).윤명선형제님(38세).이창식형제님(30세).김명찬형제님(36세).박재호형제님(20세).호태구형제님(19세).고재운형제님(22세).이상영형제님(38세) 들에 의해서 간증이 세워졌다.나는 1975년도에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자리에는 없었지만 나의 친구 박재호형제를 통해서 지난일을 간접적으로 알았을 뿐 아니라. 형제님들과 오랜 교회생활을 통하여 어는정도는 알고있었다.특별히 이윤규형제님께서 최초 목회를 신론교회에서하셨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왜냐하면 신론은 나의 처가집이 있는곳이고 나의장인 이봉림집사님은 이윤규목사님 과 함께 신론 장로교회를 시작한분 중에 한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수원교회 역사를 쓸수없은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지만 약간의 자격을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1970년12월 이윤규 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셔서 서문장로 교회를 시작하였다.이윤규형제님께서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에서 손수 자비로 예배당을 짓고 장로교회 목회를 하셨었다. 형제님께서는 일찍이 출애굽기와 로마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빛을 보게 되어 복음적인 목회를 하였다.

1971년 이윤규 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시게 된것은 수원영화 감리교회(수원시 영화동소재)에 권사님 이셨던 윤명선 형제님의 요청으로 수원으로 이주하시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과 안배하심 이었다. 윤명선 형제님은 1968년 수원으로 이주하셨다. 그리고 수원영화 감리교회 권사가 되었다.이때 형제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회계장부를 맡은권사로서 지방회에 참석 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회의는 성경적인 모습은 찿아 볼수없고 정치적이고. 세상적이며. 괴상한 상황을 보았고 또 감리교회의 목사님의 합당치 않은 일처리와 성도들간의 모함과 비방. 미움과다툼을 보고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에 주님는 성령에의한 순수하고 깨끗한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 그래서 신론에서 목회하시던 이윤규형제님을 찿아가 수원에 오셔서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어떻게는가. 라고 교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것은 이윤규형제님이 윤명선형제님의 매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문장로교회를 세우게 된동기가 된것이다.

1972년 4월 이창식 형제님께서 30세에 서울에서 이윤규목사님의 교회를 돕기위해 젊은 새댁이었던 이순자 자매님과 함께 수원으로 이주 하셨다.이렇게 된것은 이윤규형제님께서 마포구 공덕동신학교에 다니실때 고종사촌 이었던 이창식형제님을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되었는데.그때 이형제님은 공덕동에 살았고 자주 만나서 교제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창식형제님은 이윤규목사님. 윤명선형제님과 함께 서문장로교회 부흥을 위하여 자주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였으며. 함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이창식형제님께서는1973년1월 주님께서 살기 어려운 시절에 안정된 직장을 주셔서 취직하시게 되었다.

이때 주님은 여러명의 젊은이들을 얻게하셨다. 젊은사람들 중에는 20대의 수원 병무청에 근무하는 젊은 여자 장교자매(최 중위)가 있었는데 주님께 대하여 아주 열심이있고 반듯한 자매였으므로 그녀는 청년회를 부흥시키는데 일조하였다.그녀는 후에 미국으로 시집을가서 목사 사모님이 되었으나 회복안에 는있지 않게되었다.

1972년 10월 수원종로 감리교회에 다니시던 김명찬 형제님께서 종로감리교회에 내분으로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참된교회를 보여달라고 주님앞에 나아가 새벽마다 기도하였다. 이때 집으로 가던중 화서문삼거리 쪽에서 새로 개척을 시작한 서문장로교회를 발견하고 거기서 이윤규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성경대로 하나님은 섬기는 목사님인것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교통을 나누게 되었다.그리고 매일아침마다 주님앞에 회개하며 교회를 부흥시켜달라고 부르짓으며 기도하였다. 김명찬 집사님은 우리가 다알듯이 내적 생명을 주의하는 형제님이셨다.

1973년9월 새벽에 주님께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할때에 주님께서 김집사님을 찿아오셨다고 한다.그리고 주님의임재를 체험한후 집사님은 자신을 주님께 모든것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로 김 집사님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지는 않았으나 성령의 능력이 있었다.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은 김명찬 집사님께 수요일저녁 말씀을 전하도록 맡겼다. 1973년 11월에는 신론리 부흥회에도 같이가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곳에서 성령의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 아래 찬송가는 부흥회때 형제님들께서 복음을 위하여 부른 찬송가이다.

"내구주 죽으신 십자가 하나님 만족케 하셨네 그피로 내죄를 씻었네 찬송합시다.찬송합시다."

첫번째 찬송가의 원래 가사는 찬송합시다.찬송합시다,였다.그런데 이것을 구경합시다,구경합시다,로 바꾸어서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복음을 구경오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것이었다.

두번째 찬송가는 패니 크로스비가 부른 찬송가이다.

“예수를나의구주삼고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니 이세상에서 내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1973년 서문장로교회 근처 서문아파트에 사셨던 이상영형제님은 어린 아들2명을 잃은 슬픔을 격으셨는데.이상영형제님의 두 어린아들은 서문장로교회 교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로인해 이윤규목사님 과 고재운 형제님은 이상영 형제님을 찿아가 주님의 위로와 구원을 전하였다.이때 이상영형제님께서는 슬픔을 딪고 일어나 서문 장로교회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이상영 형제님께서은 복음 전하는 은사를 주님께 받았다. 형제님께서는 어는곳에서나 언제나 주님을 복음으로 전하는 분이셨다.

그 당시 젊은청년이었던 신융식(1971년).박재호(1972년).호태구(1972년).고재운(1972년 8월) 형제님도 연결되어 함께 청년회 봉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의 목회가 더 한층 강화되어 1973년도에는 교인수가 80여명으로 급속하게 증가되였다. 1972년 8월 영화감리교회 어원영권사의 추전으로 윤명선 형제님은 춘천의 시골 감리교회에 필요가 있어서 서문장로교회를 이윤규형제님께 맡기고 그곳에가서 1년반 정도 전도사로 목회를 하였다.

그러던 중에 수원에서 왕중생(한국인으로 대전 대덕이 고향임.한국이름 권익원.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 가심.대만에서 회심후 왕중생으로 개명하심 1966년 위트니스리에 의해 한국의 복음을 위하여 보내어짐)형제님을 모시고 특별 복음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받고. 복음집회에 참석하여 왕중생형제님을 처음으로 알게되었고 형제님으로 부터 성경적인 교회에 대한 빛을 보게 되었다.그래서 춘천감리교회에 사표를 내고 수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73년 11월 부흥회를 개최하기위해 부흥강사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원주에서 목회하셨던 황태일 목사님으로 부터 성경적인 복음을 전하는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분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때 왕중생 형제님께서 보내신 세분의 형제님들께서 오셔서(문병윤.정이모.미국형제인 요한) 왕중생이라는 분을 부흥강사로 초청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 왕중생형제님(중국어를 매우 잘하셨음)과 윤금석형제님(중국어를 잘하셨음)과 문병윤형제님께서 복음집회를 위하여 수원에 오시게 되었다 . 그런데 마치그분들의 모습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처럼 평화가 가득한 얼굴로 빛나고 있었다.그리고 그날 저녁 왕 형제님께서 말씀은 전하시는데 하늘에서 직접내려와서 말씀을 전하는 분 같았다.

요한 복음 3장16절을 플어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이전에 우리모두는 너무 잘 알고있는 말씀이었지만 이것은 너무나 새로운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을 이땅에 보내셨는데 이분이 하나님이시다. 문둥병자와 같은 타락한 죄인인 우리을 위하여 주님은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다.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날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셨는데 이제 그리스도는 영으로 우리와 연합되셔서 우리안에 사시는 분이시다. 라는 말씀에 놀라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에 그리스도가 내주하는 분이라는 것을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말씀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집회에참석한 많은이들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수원교회는 장로교로부터 큰 전환을 하게 되었다.

복음집회가 이틀이 지난후에 왕중생형제님께서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구원받은 믿는이들의 연합체일뿐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은 간판은 내려야하고 내리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집회를 할수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4분의 형제님들께서는 왕중생 형제님의 말씀이 성경적인 올바른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교회 간판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때 형제님들의 회의를 통해 서문장로교회 간판을 내리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수원교회 집회소 간판을 달고 떡을 떼기시작하였다.이것이 1973년 12월 수원교회 간증의 시작 이다.

그후 어떤 집사는 간판이 내려진 것을 보고 누가 간판을 떼었는가 라고 하며 화를 내며 안절부절하였다. 진리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던 사람들은 스스로 안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인의 수가 점점 감소하여 주님께 분별된 40여명(남은사람들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다.) 의 성도들이 수원교회의 시작인수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간판이 바뀐것을 보고 집을 빼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악한 자가 수원교회 집회소를 빼앗기 위해 주인을 매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장소에 이름을 바꾸어 서문 밖 장로 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므로 형제님들께서는 서문근처 영화동 김명찬 형제님집 마당으로 옮겨 천막집회소를 짓고 그곳에서 수원교회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1974년 수원교회가 회복된후 신론에가서 부흥집회를 하였다. 이때 신론리와 갈운리의 믿는이들이 주의 회복안으로 회복되었다.이때 고재운형제님은 신론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전도사로 주님을 섬기는 김영분자매님께 매혹되었다.그것은 김영분자매님의 신앙이 주님께 사로잡힌 분이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매우 강한 영을 가진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천한 장소인 수원 천막집회소에서 왕중생형제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였다.장소는 초라했지만 그 곳은 마치 주님이 태어나신 말 구유 처럼 하나님의 은헤가 있고.주님의 임재가 있는 영광스러운 곳 이었다.

그리고 수원교회는 이윤규목사님께 월급을 공급해줄수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윤규 목사님께서는 김명찬 형제님의 집 작은 방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뻥튀기 기계를 사서 뻥튀기를 만들어 판매하며 생활을 하셨으며. 시멘트 브럭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며 생활 하였다. 고되고 힘든생활을 사셨지만 형제님께서는 주님을 위하여 사시는 분이셨다.이를 본 성도들은 너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만약 형제님께서목사의 길을 계속 가셨다면 성공할수있었던 목회였을 것이다.그러나 형제님께서는 땅에 속한 부귀와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목적을 위하여 고난의 길를 택하였고. 수원교회 간증을 세우신 분이셨다. 그런데 안타갑게도 형제님께서는 1993년에 일찍히주님의 품안으로가셨다.

이윤규형제님은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태어나셨다.1964년 말경에 이윤규형제님께서 복음을 위해 신론리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초에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작이있었다. 이윤규형제님의 큰형님께서 술에 빠져 지네는 분이셨다.그래서 “우리는 저형님때문에 집안이 망한다라고 둘째 형님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집안을 구하기위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갈운초등학교에 예수를 믿는 여선생이 있어서 만나 예수믿는것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예수믿기로 작정하고. 갈운리에다 예배당을 짓고 목사님을 초빙해서 집회를 한후 큰 형님께서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온식구가 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는데 시골에 대 종가집이었기 때문에 집안과 친척과 동네 사람들로 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어느해에 부흥회를 하게 되엇었는데 그곳에 모인 무리가 회개하며 하나님게 부르짓을 때에 그곳에 있던사람들이 모두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후 각 곳에서 심지어 서울에서도 각색 병든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이 밤낯으로 모이게 되어 치료를 받고 하는 등 야단이 났었다. 말씀의 진리도 없이 성령의 능령과 역사만 충만 했었다.그러므로 그곳은 통제도 안되고 제제도 안되는 과정에서 아마 사탄의 역사도 있었던것 같다.

이때 갈운리 교회는 목사와 여러명의 장로가 있을 정도로 있을정도로 규모가 큰 교회로 세워젔다. 이인규형제님도 갈운교회 장로였다.그 황태일 목사님이 성령의 체험을 한 많은 젊은사람들(7-8명)을 신약에 기록된 대로 둘씩 각 고을로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그때 이윤규형제님과 어떤 젊은이도 함께 신론리로 보내졌다. 후에 이윤규형제님만 남아서 신론리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윤규형제님이 이봉림 형제님의 가정과 이원순자매님 가정 봉화 자매가정과 최길순자매님 얻어 신론리에서 신론 장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때 이원순자매님은 이전 강원도에 살때부터 주님을 믿었으므로 신론리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하였다.그리고 공회당에서 모이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는 방에서도 모였다. 영림서 땅의 전나무를 허락받아 많치 않은 식구들이지만 온 식구들이 함께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원순자매님가정은 큰 미루나무를 기증하여 예배당 대들보로 썼다고 한다.이윤규형제님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았다. 이렇게 하여 신론장로교회가시작 되었다. 그후에 사탄은 동네 사람들을 사용하여 예배당 앞에다 상여를 두는 집을 짇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그렀게 하였던 사람들은 후에 오래 살지못하고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그시절 의 생활은 너무나 어려웠다. 재력가 믿는이였던 미원회사의 형인사람은 각지 교회를 다니면서 선교를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다.그때 4000원을 받았는데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그분은 장로회 계통의 연결로 시골의 어려운 교회들을 도운 분이었다.

1965년 이윤규형제님께서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를 하시면서 신학공부를하였다.그러므로 주중에 이윤규 형제님께서 안계시므로 성도들이 돌아 가면선 설교를 하며 교회생활를 하였다.1968년경 이윤규형제님께서는 서울에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시고 신론리에서 목회를 계속 하였다. 1971년에 윤명선형제님께서 신론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윤규형제님은 이인규 장로님께 교회를 맡기고 수원으로 이주하였다. 이인규장로님께서 갈운리에서 오셔서 신론장로교회을 돌보셨다. 71년 말에 김영분자매님께서 전도사로 신론에 오셨다.이때 김영분자매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하여 성령의능력이 충만한 전도사 였다.

1975년에 영화동 거북시장 근처 평화 목욕탕 2층에 새로운 집회소를 마련하여 그곳에 모이기 시작하였다.이때 나는 워치만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책의 도움으로 로마서의 구원에 대한 빛을 통하여 수원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다.이때 수원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천사처럼 밝게 빛나고있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신언하며 그리스도를 누리는 빌라델피아 교회생활을 실행 하였다.

그러나 기쁨의 찬 누림의 교회생활은 2-3년이 지난후 형제님들 가운데 서로 하나되지못하는 상황이 싹트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경 지식이 증가 하게 되었으므로 각자의 의견과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었다.그때 집회상황은 각자가 머리가되는 상황이었다. 한지체가 영이라고하면 다른 지체는 육이라고 말하고.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심지어 성경책을 집어던지며 서로 다투기 까지하였다.

그러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오셔서 집회도하시며 공급을 해 주게 되었는데. 그때는 잠시 상황이 좋아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여 교회가 전진하지 못하고 기쁨과 누림을 같지 못하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안에 합당한 질서를 세워야 할필요가 있으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1976년에 수원교회 직분을 안배해주셨는데 윤명선 형제님을 수원교회 대표장로로 임명하였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간증할수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수원교회 인도를 윤명선형제님께서 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체계를 부인하는 몇몇 형제님들은 함께하지 못하고 수원교회생활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일년에 2차례 전국특별집회가 있었고 대만에서 봉사하시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동역자들께서 오셔서 한국교회에 많은 공급을 주었다. 대만의 동역자 형제님들의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듣지못했던 영적인 새로운말씀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었다.

1982 년 왕중생형제님께서 주님품으로 가셨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에서 분열되어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길을 가게 되었었다.그러므로 교회는 전진하지 못했고.교회생활의 기쁨은 사라지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었다. 대만의 동역자들 과 위트니스리형제님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한국교회는 하나의 간증을 회복하였고 1988년 부터 사역을 긴밀히 따라가게 되었다.

1980대를 거치면서 주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루셨다.우리의 자아와 천연적인사람을 처리하셨다고 말할수있다.이러한 환경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한단계 생명이 성숙하게 되었다.예를 들면 1991년 어느날 윤명선 형제님께서 나를 찿아 오셔서 목양해 주셨다. 이전에 나는 지기를 싫어하는 자아가 강했던 형제였다.그래서 형제님과 나는 80년대에 감정의 골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윤형제님은 이전의 윤형제님이 아니셨다. 이때의 형제님은 말년의 야곱처럼 어떤형제도 받을수 있는 마음으로 넓혀지셨다.

1994년에 있었던 사건을 하나 소개 하겠다.수원교회 초기 교회생활에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였던 김진영 형제님이 계셨는데. 유명선형제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수원교회 생활를 떠났었다. 나는 두분 형제님께서 화해 하지 못한 것으로인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주님앞에 가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두분 형제님들께서 화해하여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1994년 어느날 두분 형제님들께서는 만나게 되었다. 이때 윤형제님께서는 잘 잘못을 떠나서 김진영형제님께 지난과거의 모든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김진영형제님께서 정자동 선경마그네틱공장앞에있던 수원교회 집회소에 나오신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진영형제님의 수원교회생활은 회복되지는 않았다.그후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김진영형제님께서 주님품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1996년 위트니스리 형제님께서는 한국교회 장로 형제님들 60여명을 애너하임으로 초청하여 6개월의 장로훈련을 진행하셨다. 윤명선형제님께서 미국에서의 장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신 후 정선으로 가시게 되었다.그리고1997년 이창식형제님께서 수원교회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부산에서 안태우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셨다.그리고 1998년 수원교회는 두개의 집회소로 나뉘어봉사하게 되었다.

이창식형제님께서는 1집회소에는 이창식.황영일 .황장성형제님을 안배하였고.2집회소는 고재운.강성희 안태우.김철배 형제님을 안배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2003년 이창식형제님께서는 갑자기 수원교회 인도직분을 내려놓으신다고 선포하셨다.왜 이창식 형제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알수없다.

그리고 수원교회는 1.2집회소로 나뉘어 봉사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1.2집회소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그러므로 아이들 조차도 서로 우리집회소관념을 가지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2004년 윤명선 형제님께서는수원교회의 분열된 상황을 보시고 하나로 모이도록 인도해 주셨다.그리고윤 명선형제님과 고재운형제님과 강성희 형제가 수원교회를 인도하도록 하셨고. 1집회소의 모든 봉사를 내려놓고 2집회소의 봉사체계안으로 들어가도록 선포 하게 되었다.이렇게 하신것은 자신을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공과를 배우도록 인도하신것이라고 윤형제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원교회가 하나로 모이게 된후 2005년 오유성형제님과 임홍형제님의 교통을 통하여 아주대학교 앞쪽에 학생센타와 수원교회 집회소를 구입하고 이주하게 되었다. 2008년 형제들의 야심과 시기와 타툼으로 고재운형제님께서 안타깝게도 수원교회 봉사를 내려놓고 여주로 이주하셨다. 오랜시간동안 나는 고형제님과의 아름다운 동역이 있었지만후에 형제님의 봉사에 누를끼친것을 후회했다.형제님께서 봉사를 지속하지 못하게 된것에 대한 나의 주님앞에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형제님께 용서를 구했으며 수원을 떠나지 마시기를 구했지만 결국 형제님께서는 여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신것 같다.

지나온 과거 42년 수원교회의 역사를 회고 해 볼때 많은 믿는이들이 수원교회생활을 거쳐 갔지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많지 않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쓰임은 받았으나. 회복안에 있지 않고 떠나 갔다. 그리고 어려움 과 고난속에서도 간증을 지키신 분들도 계신다. 나는 간증을 지키신 분들을 통하여 많은 생명의 공급을 받고 온전케 되었으며 생명이 자랄수 있었다.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간증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앞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수 있었다. 이와같이 수원교회의 역사는 헌신의 역사였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 고난이 있어도. 자신의 영광과 장래를 위하여 살지않고 모든것을 주님께 다 드린 아름다운 헌신이 수원교회를 건축하게 된것이다.

(위 글은 2015년1월과 2월에 걸쳐 윤명선형제님.김명찬형제님.이창식형제님.고재운형제님,윤영자 자매님,이원순자매님들로 부터듣고 증언해주신것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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