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0-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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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감자 2023-03-19 , 조회 (22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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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0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

성경: 느 8:1-10, 13:14, 29-31, 마 20:25-28, 23:8-13, 히 13:7


Ⅰ.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와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다. 인도 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이거나, 계급적이지 않다 ― 살전 1:5, 2:1-14, 5:12-13, 히 13:7, 17, 24.


A. 인도 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은 천연적인 관념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사실상 천연적인 의미에 따른 인도 직분이 없다 ― 마 20:25-28,23:8-13.

1.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인도 직분은 노예를 의미한다. 인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기꺼이 노예가 되고자 해야 한다 ― 막 10:35-45.

2. 인도 직분은 생명의 성장에 의해 형성되고, 필요에서 나온 결과이다. 필요가 없다면 인도 직분은 나타날 수 없다 ― 벧전 5:1-3.

3. 인도 직분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제쳐 두시려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의 인도 직분이 항상 영적인 역량에 달려 있도록 정하셨다 ― 행13:2, 9, 14:12, 갈 2:11-14.

4. 주님의 회복 안에는 조직화된 인도 직분이 없고, 통합하는 조직이 없다. 그 대신 모든 지체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시는 한 머리가 있고, 하나의유기체인 몸이 있다 ― 엡 1:22-23.

B. 신약에 따르면, 사도들의 권위는 영적인 것이며 그들의 말씀의 사역 안에 있다 ― 행 2:42, 고후 13:5-6, 살전 2:13.

1. 사도들은 교회의 사무에 개입하는 위치상의 권위를 갖지 않는다. 그들이 공급한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 골 4:16, 히 13:7.

2. 교회들이 사도들을 따르는 것은 사도들에게 신약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 빌 2:12, 행 20:17-36.

3. 어떤 교회가 빗나가거나 잘못된 길로 간다면,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상황을 처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 행 20:26-27, 고후 10:6, 딤후 1:13, 4:2.

4. 인도 직분은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산출되고 강화되며 제한받는다 ―딛 1:9.

C. 신약에는 한 인도 직분이 있는 한 사역이 있다 ― 행 1:17, 25, 고후 4:1.

1. 오늘날의 기독교가 분열된 것은 너무 많은 인도 직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역이 하나이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

2. 하나님과 주님과 그 영께서 모두 하나이시므로 인도 직분도 하나이다. 하나의 인도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 영의 하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 엡 4:3-6.

3. 신약은 사역에서 인도하는 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 권위, 곧 건축을 위한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 고후 13:10.

a. 하나님의 대표 권위는 인도하는 이들의 가르침 안에 있었다 ― 고전4:17하-21, 7:17하, 11:2, 16:1, 살후 3:6, 9, 12, 14.

b. 각처 각 교회에서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울의 대표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 고전 4:17하.

D.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신약 사역의 인도자들 자신 안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신약의 가르침 안에 있다 ― 행 2:42, 딤후 3:10.


Ⅱ. 신약 사역에서의 인도 직분은 통제하는 한 사람이 가진 인도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라는 통제하는 한 이상이 가진 인도 직분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거스르지 않고”라고 선포했다 ― 행 26:19.


A.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사도들을 통해 밝혀졌지만, 믿는 이들이 그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것을 회복하실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헬. 오이코노미아)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집,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가정 행정이다 ― 엡3:2, 8-9, 딤전 1:3-4, 3:15, 엡 1:10, 2:21-22, 벧전 4:10.

B. ‘회복’은 손상이나 손실을 입은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되거나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표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회복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내용들에 대한 주님의 회복의 현재의 전진에 따른 것이다.

1. 주님의 회복은 육체 되심과 포함과 강화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안에서 우리의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 골 1:17하, 18하, 시 80:1, 15, 17-19, 요 1:14, 고전15:45하, 계 2:4-5, 7, 17, 3:7-8, 12-13, 17-22, 4:5, 5:6, 요 6:57,14:21, 23, 21:15-17, 비교 렘 32:39.

2.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 요 17:11, 21-23, 엡 4:3-4상, 계 1:11.

3.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엡 4:15-16, 롬 15:16, 벧전 2:5, 9, 고전 14:1, 4하, 12, 26, 31, 39, 렘31:33-34(33절 각주 1 참조).

C. 이 이상이 우리 안에 날마다 새로워져서 우리의 모든 생활과 일과 활동을 통제하는 이상이 되어야 한다 ― 요일 1:7, 벧전 2:9, 사 2:5, 시 119:105, 36:8-9.

D. 어떤 사람이 주님의 회복을 떠나는 것은 그가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의 이상을 본 적이 없다면, 사실상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 행 26:13-19, 비교 창13:14-18.

E.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대한 분명한 이상을 보아야 하며, 그런 다음 이 이상에 의해 통제받고 다스림 받고 지시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F.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인도 직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이 갖고 있는 인도 직분이다. 이 이상이 우리를 제한하고 지시하고 통제하여 혼돈과 분열을 피하게 해 준다 ― 잠 29:18상.

G. 보충 자료인 <시대의 이상> 발췌문 참고.


Ⅲ. 회복의 책인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의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점은 합당하고도 적절한 인도 직분이다 ― 느 8:1-10.


A. 주님의 회복 안에서는 하나의 통제하는 이상이 인도 직분을 갖고 있으며, 이 이상은 이상을 가져오는 이들을 통해 수행되는 한 사역 안에 있다 ― 엡 3:3-5, 9, 골 1:24-29.

1. 바울은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종들과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은 청지기들’(고전 4:1)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청지기들로서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한 하늘에 속한 이상을 믿는 이들에게 분배하였다. 이 비밀들

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이다(골 2:2,엡 3:4, 5:32). 이렇게 분배하는 봉사인 청지기 직분이 사도들의 사역이다(엡 3:2, 8-9).

2. “청지기들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고전 4:2). 바울처럼 우리도 ‘주님께 긍휼을 받은 신실한 사람’이 됨으로(고전 7:25하, 딤전 1:12) 신실한 노예들이 되어야 한다. 신실한 노예들은 언제나 습관처럼 하나님의 가족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생명 공급으로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공급한다(마 24:45-47). 우리는 이 시대에서 주님의 일에 신실한 이들이 되어 다음 시대에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이들이 되기를 원하며, 주님의 칭찬과 보상은 우리가 한 일의 크기나 양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사를 최대한으로 사용한 우리의 신실함(마 25:21-23, 비교 계 3:8)과 관계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B. 오직 느헤미야와 에스라 같은 이러한 신실한 사람들의 인도 직분 아래서라야 이스라엘이 재조성되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인 하나님의 증거, 곧 이방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표이다 ― 느 13:14, 29-31,딤전 3:15.

C. 느헤미야는 에스라 없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1. 느헤미야는 나라를 재조성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을 인식했다.

2.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는 기꺼이 에스라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D.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몸을 합당하게 대표하는 일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조화된 이들이 수행한다 ― 고전 1:1, 출 4:14하-16.

1. 혼자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것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어지는 것은 몸의 원칙에 따라 보내어지는 것이다 ― 눅 10:1, 행 13:1-3, 롬 12:5, 살전 1:1.

2. 개인주의적으로 행하는 것은 몸의 원칙을 범하는 것이다.

3. 주님의 회복 안에는 몸을 건축하는 참된 일이 긴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의 일은 오직 조화된 동역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 빌2:19-22.

E. “주님은 나와 함께 노예가 되어 섞이는 방식으로 함께 섬길 많은 형제들을 그분께서 예비하셨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몸을 위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예비하신 것이며,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최신의 길이라고 느낀다.” ─ 1997년 3월 24일, 위트니스 리(위트니스 리 전집, 1994-1997년, 5권, ‘감사를 드리는 교통의 편지’, 영문판, 525쪽).



<시대의 이상>에서 발췌한 보충 자료> 이 시대의 완성된 이상을 긴밀히 따름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첫 번째 이상에서부터 교회의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에 관한 궁극적인 이상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완전한 이상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이상이 우리에게 완전히 열렸다.

타이베이시에 있는 고궁 박물관에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고 불리는 긴 두루마리 그림 한 점이 있다. 거기에는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중국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과 풍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긴 두루마리의 처음 몇 부분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국인들의 생활상의 전체 모습에 관해 분명한 그림, 곧 분명한 ‘이상’을 가지려면 두루마리의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끝까지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우리 자신의 그림, 우리의 ‘청명상하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에 대한 아담의 이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명나무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포괄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러한 이상의 마지막 광경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전의 모든 광경들을 내포하는 마지막 광경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

최신의 궁극적인 이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상을 긴밀히 따라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따르지 않으며 이상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현시대에 속한 이상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결된 이상이다.

주님의 회복은 우리의 사랑하는 니 형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때문에 형제님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1934년에 형제님은 항저우에서 결혼했다. 몇몇 사람이 그 기회를 틈타 소요를 일으켰다. 형제님이 매우 슬퍼했으므로, 나는 어느 날 형제님을 찾아가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니 형제님, 형제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천연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형제님이 취하는 길을 취하고 형제님이 전하는 것을 전하는 것은 형제님과의 천연적인 우정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너무나 다릅니다. 저는 북부 지방 사람이고 형제님은 남부 지방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님이 가고 있는 동일한 길을 가는 이유는 제가 형제님이라는 사람을 따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형제님이 취하고 있는 그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니형제님, 저는 형제님이 이 점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 형제님이 이 길을 떠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몇몇 사람이 소요의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이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자 그들은 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니 형제님께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어느 날 형제님이 이 길을 떠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저는 형제님 때문에 이 길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형제님 때문에 이 길을 떠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의 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오십이 년이 흘렀다. 오늘날 나는 내가 해 온 모든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오십이 년 동안 나는 동일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보아 왔다. 어떤 사람들이 왔다가는 떠나갔다. 한 장면이 바뀌고 또 다른 장면이 시작되었다. 대만에서 우리의 일이 시작된 이래로 지난 삼십 년 동안, 우리는 몇 번의 중대한 위기들을 목격했다. 심지어 내가 구원받도록 인도했고 나에게 직접 훈련을 받았던 형제들이 주님의 회복을 떠났다. 이상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참으로 변했고, 이상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변했다.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진지한 한마디의 말을 해 주고 싶다. 주님의 긍휼로 나는 오늘 여기에 서서 여러분에게 이러한 이상을 전해 주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나라는 사람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긍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 준 이상을 따르기를 바란다. …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상을 계시해 주신 것은 참으로 그분의 긍휼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이 이상을 따를 것을 조언한다. 이 이상은 바로 니 형제님과 모든 시대에 걸친 주님의 모든 종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첫 장면인 아담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인 새 예루살렘까지를 포괄하는 이상이다.(시대의 이상, 2장, 70-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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